[줌인] 국내외 투쟁 헌신… '나라사랑 DNA' 유공자만 11명

[줌인] 국내외 투쟁 헌신… '나라사랑 DNA' 유공자만 11명

[줌인] 국내외 투쟁 헌신… '나라사랑 DNA' 유공자만 11명

Blog Article

충남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산 60-5 이규풍 규갑 형제의 가족묘역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가족들의 묘와 충국순의비, 오충비 등이 있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 충무공 후손들 이규갑 (왼쪽부터) , 이애라 , 이길영 , 이응열 , 이민화. 사진=국가보훈부 한 집안이 수백 년을 사이에 두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오랜 세월 가문의 혈통과 가풍, 정신까지 온전하게 이어지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은 조선을 구했고, 300여년 뒤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위례 분양권 전매
자 이번에는 그 후손들이 광복에 나섰다. 나라 사랑의 DNA가 시간을 초월하여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다. 먼저 3대에 걸쳐 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이규풍·이규갑 형제 집안이 눈길을 끈다. 이들 형제는 충남 아산에서 충무공의 9세손인 이도희와 박안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규풍은 대한제국 궁중 내직에서 일하다 1905년 을채무불이행책임
사늑약이 체결되자 벼슬을 내놓고 낙향했다. 어머니 박안라는 이 무렵 규풍, 규갑 형제에게 집을 나가 일제와 싸우라고 강권했다고 한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충무공 직계 후손 이규풍은 1906년 러시아 연해주 연추(크라스키노 인근)로 망명했다. 러시아 국적의 국민은행 예금이자
한인 부호 최재형과 간도관리사 이범윤 등이 조직한 의병부대 동의회에서 활동했다. 이 부대는 함경도 진격작전을 벌였다. 1910년에는 유인석을 도총재로 하는 의병부대 13도의군에 참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유인석 등과 항일 비밀 결사조직 성명회를 만들었다. 일제의 압력을 받은 소련은 13도의군과 성명회 간부 42명을 체포했는데 이때 이규풍도 13도의공동담보 경매
군과 성명회 지도자로 지목되어 이르쿠츠크로 쫓겨났다. 유형에서 풀려난 이규풍은 귀국하여 한성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 임시정부는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이 만든 새로운 정부조직이었다. 임시정부의 집정관 총재는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맡았고, 이규풍은 박은식 신채호 등과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다시 해외로 건우리은행 마이너스통장 금리
너간 그는 1926년 중국 길림성 길림에서 고려혁명당에 참여했다. 위원장은 양기탁, 책임비서는 이동구였으며 그는 위원을 맡았는 에 일경이 당원을 체포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 1931년 6월 하얼빈과 다롄을 잇는 중동철도 선상의 육참에서 순국했다. 이규풍의 장남 이민호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의사였던 그는 3.1운동이 일어부산고려저축은행
나자 황해 충청 전라도를 다니며 만세운동을 도모하다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3년형을 치렀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22년 러시아로 망명하여 병원을 설립,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만주로 옮겨 항일운동 단체 신민부에 참여했으며, 27년경부터 중동선 아성현, 30년에는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33년에서는 간도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아버지 이규풍이 사망하자 북경에 가대부업등록협회
서 지하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는 그를 체포하여 심하게 고문했는데 그가 사경에 이르자 석방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5월 순국했다. 이규갑 애국지사의 묘와 묘비. 그의 형 이규풍 지사는 중국에서 순국, 묻힌 곳을 알 수 없다. 현대차미소금융재단
이규풍 규갑 형제의 묘역에 세워진 오충비에는 박안라 오사라 이규풍 이애라(앨라) 이민호 5명의 생몰 연대와 독립운동 기록이 적혀 있다. 이민호의 아들 이길영도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2년 어머니 정수정(이민호의대출금상환계산기
아내)과 함께 한국광복군에 참여, 북경 방면 공작원으로 파견돼 군인을 모집했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협력, 군사훈련을 받았다. 미군과 연합작전을 위해 훈련을 받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이규풍의 동생 이규갑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공주 영명학교에서 한문교사로 일했다. 신학도 공부했던 그는 성심수녀회
신홍식 목사가 담임하던 평양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다가 1919년 신 목사를 따라 상경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출범한 한성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와 함께 한성과 상해의 임시정부 사이에 원만한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해임시정부의 입법부인 임시의정원에 충청도 의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경 귀국하여 서울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고, 신간회 경동지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이규갑의 아내 이애라는 비운의 투사다. 이화학당을 나와 교사로 근무하다 20세에 이규갑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 후 남편이 일하는 공주의 영명학교에서 함께 근무했으며 남편이 평양의 전도사로 가자 평양 정의여학교로 옮겼다. 남편이 3.1 만세운동을 뒷바라지했으며,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평양경찰서에 구금됐다. 이 무렵 서울에서 친척집을 가다가 일본 헌병을 만났는데 그들은 이애라가 등에 업은 갖난 아이를 빼앗아 내동댕이쳐 죽게 했다. 이애라는 남편이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나섰을 때 비밀 연락 등을 수행했으며, 남편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동안 수원 공주 아산 등의 교회를 다니며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모금운동을 벌였다. 공주 경찰이 그를 연행, 고문하며 남편의 행방을 물었으나 끝내 밝히지 않았다. 1921년 망명을 위해 두 아이 데리고 함경북도 웅기에 이르렀으나 일본 순사에게 붙잡혔다. 경찰은 남편의 거처를 대라며 고문했고,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외부 치료를 허용했다.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편을 만났으나 며칠 뒤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일제가 작성한 충무공 14대 종손 이응열에 대한 감시 기록카드. 이응열의 인적 사항과 수형 기록이 적혀 있다. 충무공의 13대 종손 이종옥과 14대 종손 이응렬도 광복운동을 벌였다. 1887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난 이종옥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뒤 백두산 서쪽의 독립운동 기지 백서농장에서 일했다. 1919년에는 독립군 50여명이 참여한 광복단 결사대에 가입한 뒤 국내로 돌아와 친일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으다 일경에 체포됐다. 1923년에도 독립운동을 벌이다 아산 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돼 고초를 겪었다. 이응열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던 중 하숙집에서 동료들에게 내선일체는 어려우며, 때가 되면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게 발각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898년 아산 염치에서 태어난 이민화는 1917년 간도로 망명, 서로군정서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김좌진 서일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에 참여, 교성대 소대장으로 군사활동을 벌였다.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싸웠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로 넘어가 대한독립군단에 참가했다. 자유시참변이 발생하자 다시 밀산으로 가던 도중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천안 출신의 이붕해도 고향에서 3·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뒤 청산리전투 등에서 장교로 활약했다. 고려혁명군 조직에 참가, 무장투쟁을 벌였으며, 1925년에는 김좌진이 신민부의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자 그 아래에서 경비대장으로 일했다. 1930년 김좌진이 피살되자 임시치안대를 조직하여, 암살의 배후로 알려진 인물을 처단했다. 1869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10대손 이규현도 1905년부터 원용팔 의병부대와 정운경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충북·강원 등에서 싸웠으며, 1907년에는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참모를 맡아 활동했다. 청양 출신으로 만주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의군부 3도사령, 임시정부 참모부 차장,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 등을 지낸 이세영 애국지사도 충무공의 12대손이다. 충남 아산시 음봉면 삼거리 이 충무공 묘 인근에는 충무공파 문중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충무공 후손 중 공식 독립유공자는 11명이지만 실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규풍 규갑의 어머니 박안라, 중국에서 남편 및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일 벌인 이규풍의 아내 오세라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민호와 권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은영 하영 순영 형제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모두 실종됐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시기 이념의 광기에 휩쓸려 희생된 사람도 많고, 독립운동 공적을 확인할 수 없어 빠진 사람도 있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친일파 후손들이 호의호식하고 큰 소리치며 살고 있다. 이름도 없이 사라진 충무공 후예들에게 송구할 뿐이다.

Report this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