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청산리전투 승리 견인… 신민부 결성 등 한평생 독립운동

[줌인] 청산리전투 승리 견인… 신민부 결성 등 한평생 독립운동

[줌인] 청산리전투 승리 견인… 신민부 결성 등 한평생 독립운동

Blog Article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청산리의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2001년 대한광복회와 연변의 조선족이 함께 건립했다. 사진=독립기념관 ◇ 김좌진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충남출신 애국지사 김좌진 친동생 김동진(왼쪽부터) , 김좌진 6촌동생 김종진 , 박영희 (충남 부여 출신)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 만주와 연해주 일대는 1910년대부터 독립군의 활동기지로 성장했다. 일제의 수탈을 피해 이주한 수많은 한인들이 농토를 일구며 살았다.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유격전을 펼치기에 유리했고, 조선과 국경을 접해 국내 진공에학자금대출생활비
도 용이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망명해온 독립운동가들이 곳곳에서 군사를 모아 무장투쟁에 나섰다. 백야 김좌진이 이끄는 부대도 단기간에 명실상부한 전투조직으로 성장했다. 백야는 1919년 8월 대종교 계열의 대한정의단 산하 무장조직인 대한군정회 때부터 군사를 이끌었다. 정의단에서 정통무관인 김좌진을 초빙하여 군사부문을 맡긴 것이다.BIFC 대통령
1919년 12월 군정회는 상하이 임시정부 소속의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로 편제되었다. 충남 홍성읍에 세워진 백야 김좌진 장군 동상. 김재근 선임기자 백야가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참모장 이장녕 김규식 최해 이범석 등햇살론대출
은 대한제국 군대에서 근무했거나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인재였다. 김좌진이 서로군정서의 이상룡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이들을 기꺼이 보내줬다.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를 세워 체계적으로 근대적인 군사지식을 가르쳤다. 사관학교에서는 6개월 동안 역사와 군사학, 무기체계와 전술 등을 가르쳤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과 교재를 지원받았다. 백야의발급기관명
부대는 무기를 구입, 화력도 갖춰나갔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6월 블라디보스톡 체코군단 등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했다. 이때 구입한 신식무기는 소총 1200정, 기관총 6정, 탄약 80만 발, 박격포 2문 등이었다. 1920년 6월 홍범도와 최진동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 소속 독립군 연합부대에게 봉오동에서 패한 일제는 대대적인 독립자영업자대출
군 토벌 계획을 세운다. 일제는 중국 영토로 진입하기 위해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일본군 19사단 간부가 중국인 마적 두목 장강호를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새벽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한 것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독립군 소행이라고 선전하며 3만-3만5000여 명에 이르는 군단급 병력을 투입했다.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에자대출
대비하여 8월부터 산세가 험한 백두산 쪽으로 옮겨갔다. 백야의 북로군정서도 10월 12-13일 경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했다. 독립군 병력은 북로군정서 700-800명,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300-1400명 등 3050-4700명 정도였다. 백야 김좌진 지휘 아래 청고용지원센터취업알선
산리전투를 벌인 북로군정서. 맨앞에 앉은 사람이 김좌진이다. 자료=백야기념관 김좌진 부대가 체코군단에서 구입한 모신나강 소총은 청산리전투 당시 독립군의 주력 화기였다. 회피기주류대출
동을 하던 백야의 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쫓고 쫓기고, 치고 빠지는 전투가 벌어졌다. 10월 21일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 위쪽 고개와 계곡에 매복해있다가 일본군 선발대를 기습공격하여 패퇴시켰다. 뒤따라온 야마타가 지휘하는 본대가 독립군을 협공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이 높은 곳에서 조준사격을 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일본군은 큰박근혜 부산
희생을 치른 채 도망쳤다. 백야의 부대는 22일 새벽 갑산촌으로 이동, 천수평에서 야영 중이던 일본군 기동중대 120여 명을 섬멸했다. 오전 9시경부터 김좌진 홍범도 연합부대는 일본군 동지대와 어랑촌에서 싸웠다. 전투는 저녁 7시경까지 계속됐으며 독립군은 날이 어둬지는 틈을 타 추격대를 따돌리고 어랑촌을 탈출했다. 독립학자금대출 저금리 전환 방법
군은 23일부터 일본군과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며 고동하 상류로 이동하였다. 25일 밤에는 홍범도 부대가 고동하 계곡에서 야영 중 급습을 당했으나 전열을 수습하여 빠져나온 뒤 역습을 단행,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줬다. 김좌진 부대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은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백운평에서 천수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에서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청산리 전투 결과 우리측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가 1200명, 부상자는 3300여 명에 이르고, 일본측은 전사자 11명, 부상은 24명이라고 주장하는 등 크게 엇갈린다. 청산리전투와 맞물려 1920년 10월-21년 4월까지 경신참변(간도참변)이 벌어진다. 일제는 만주의 독립군을 소탕하려다 청산리전투에 대패하자 19사단을 비롯 2만5000명의 병력을 간도에 투입, 살인과 강간, 방화 등을 저질렀다. 독립군은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11월-12월 중국과 소련의 접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 전열을 재정비하고 여러 부대를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홍범도, 김좌진은 참모부장을 맡았다. 총병력은 3500여 명에 이르렀다. 1930년 3월 만주에서 거행된 김좌진 장군 사회장. 자료=홍성군 대한독립군단은 보급과 지원을 받기 위해 소련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갔다가 참변을 겪는다. 러시아 극동공화국의 볼셰비키 적군파는 독립군에게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자 무장해제를 강요하며 포위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독립군이 죽거나 체포됐다. 백야는 당초부터 자유시 합류를 반대했고,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회군, 피해를 면했다. 김좌진이 순국한 중국 해림의 금성정미소(복원). 사진=독립기념관 백야는 1925년 북만주지역에서 결성된 신민부에 참여한다.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 등이 참여한 이 단체는 독립운동과 동포들을 위한 자치와 산업진흥 등을 추진했다. 그는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 맡았으며,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지휘관을 배출했다. 백야는 2029년 7월 남대관 이붕해 등의 무정부주의자들과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만주에도 공산주의가 널리 퍼졌는데 백야는 이를 싫어했고,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백야가 위원장, 권화산이 부위원장이었으며, 지방에 자치조직을 구축하고 50여개의 소학교를 운영했다. 순국지 금성정미소 앞에 세워진 백야 김좌진 흉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던 백야는 비통하게 최후를 맞는다. 1930년 1월 24일 금성정미소에서 박상실의 흉탄에 숨을 거둔 것이다. 정미소는 동포 농민들의 편의를 돕고, 중국인 정미소의 독점과 횡포를 막기 위한 시설이었다. 박상실은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으로 알려졌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백야는 41년의 생애 동안 오직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다 간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상징이다. 청산리 전투를 이끈 장군으로서도 유능했지만 가는 곳곳마다 학교를 세워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한 선각자이고 교육가였다. 또한 전쟁이 군사 뿐만 정신적 물질적 토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몸소 실천했다. 한인 동포들을 보호하고 교육과 산업을 장려했다. 한인사회를 정착시키고 거기서 병력과 물적 자원을 확보했다. 동포사회와 연대감도 강했고 항전의지를 공유했다. 독립운동사에 이처럼 깊은 안목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직접 실천한 인물은 드물다. 백야와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다 순국한 충남 출신 애국지사도 기억해야 겠다. 백야의 친동생 김동진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참의부·신민부·정의부 통합 때 형과 함께 신민부 대표로 참석했으며, 한족총연합회에도 참여했다. 1937년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으며 이듬해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백야의 6촌 동생 김종진은 중국 운남성 군관학교교도대에서 군사학을 배웠다. 아나키스트로 1929년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가 되었으며, 김좌진의 명을 받아 신민부의 개편을 주도했다. 한족연합회 조직부와 농무부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1931년 7월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 살해됐다. 부여 출신의 박영희는 휘문의숙을 다니다 은사인 이시영을 따라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다. 백야를 따라 정의단 군정부에 참여했으며,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학도단장, 김좌진의 부관으로 일했다. 청산리전투에 참여했고 대한독립군단, 신민부에도 참여했다. 신민부 간부로서 소련의 도움을 받기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가 소련 비밀경찰 게페우에 체포돼, 1930년 피살됐다. 충남 보령시 청소면의 김좌지장군 묘소. 부인 오숙근 여사가 1934년 만주에서 유골을 모셔와 홍성군 서북면 이호리에 안장했다가 1957년 이곳으로 이장했다. 김재근 선임기자

Report this page